남도일보·목포대도서문화연구원 공동기획 = 전남 희망 아이콘 ‘섬·바다’이야기
<20> 김 양식 유래
1940년대 남해안 일대 김 양식 메카 ‘우뚝’
광양 태인도·완도 조약도 등에서 최초 유래설
17세기 후반부터 한국·일본 거의 동시에 시작
양국 김 양식 기술 교류없었지만 우연·필연 교차
해조류 섭취하는 ‘사회·문화적’ 배경 발달 요인

김 양식이 우리나라에 본격적으로 도입된 것은 17세기 말에서 18세기 초로 오늘날 양식산업의 토대가 됐다. 바다에 설치된 나무 울타리에 김이 부착되는 과정에서 김 양식이 시작됐다고 한다.사진은 해남군 화산 어민들이 김 뒤집기에 나선 어민들의 모습. /위직량 기자 jrwie@hanmail.net

한국과 일본의 양식어업을 선도한 것은 김양식 기술이다. 두 나라 모두 17세기 말 ~ 18세기 초를 전후하여 유사한 방식의 김양식 기술이 성립되고, 그 기술을 기반으로 20세기 양식산업의 토대가 마련된다. 양식업이 발달하지 않았던 20세기 초 김양식은 바다양식을 상징하는 것이었다. 한국의 경우 20세기부터 남해안 일대로 김양식이 확산되어 1942년에는 양식어업의 95%를 김양식이 차지할 정도로 비중이 높았다. 일본도 18~19세기에 김양식 기술이 전국으로 확산되어 바다양식의 산업화를 구축한다.

1949년까지 성행했던 광양 태인도 앞 김양식장.(광양 김시식지 전시관)/송기태 교수 제공

한국 남해안을 양식어업의 메카로 만든 김양식 기술은 우연한 발견에 의한 것이었다. 광양 태인도에 거주하던 김여익(金汝瀷, 1606~1660)이 1640~60년 무렵 해안가에 떠내려온 밤나무 가지에 이름 모를 해조가 부착된 것을 발견하고 이것을 시식(試植)해본 후 그 이듬해부터 밤나무나 대나무 가지를 갯벌에 꽂아 양식을 시작했다고 한다.

1980년대까지 지속된 광양 태인도의 섶대 김양식.(광양 김시식지 전시관)/송기태 교수 제공

또 완도군 조약도에서도 200여 년 전에 김유몽이란 사람이 해안에 떠내려 온 나무에 김이 붙어있는 것을 보고 갯벌에 나무를 꽂아 김을 양식했다는 설이 전하고, 완도군 고금도에서도 200여 년 전에 정시원이라는 어부가 고기잡이를 위해 설치한 죽방렴에 김이 붙어있는 것을 보고 대나무살을 갯벌에 꽂아 김을 양식했다는 설이 전한다.

일본에서도 동경만의 시나가와·오오모리 지역에서 김양식을 처음 시작했다. 엔포(延宝)·덴나(天和)(1673~84) 혹은 겐로쿠(元禄)~쇼토쿠(正徳)(1688~1716) 시기에 도쿠가와 막부로 ‘나물과 고기안주’를 공급하기 위해 설치한 섶나무 울타리 어항에 김이 붙어있는 것을 보고 착안을 했다는 설이 전한다. 이외에도 다양한 설이 있는데 대부분 1600년대 후반 또는 1700년대 초반에 동경만 일대에서 대나무 울타리에 김이 부착된 것을 보고 김양식을 시작했다고 한다.

일본 동경만 김양식장.(일본 동경 김박물관) /송기태 교수 제공
1935년 일본 동경만 김 양식의 섶 설치 모습.(일본 동경 박물관) /송기태 교수 제공

한국과 일본의 김양식 유래는 비슷한 점이 많다. 양국 모두 17세기 후반부터 양식을 시작하였고, 바다에 설치된 나무 울타리에 김이 부착되거나 바다에서 떠내려 온 나뭇가지에 김이 부착된 것을 보고 갯벌에 나뭇가지를 꽂아 김양식을 시작하게 되었기 때문이다. 두 나라가 김양식과 관련해 기술을 교류하지 않던 시대에 자연발생적으로 김양식을 시작하고, 유사한 기술로 김을 양식하게 된 것이다. 어떤 면에서는 대단한 우연이 일본과 한국에서 동시에 발생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김양식 기술의 발견은 이렇듯 우연한 계기에 의한 것이지만, 그 우연은 어쩌면 필연에 가까운 것이었다. 국립수산과학원에 의하면 김은 염분 적응성이 강하여 해조류 중에서 가장 넓게 분포하고 세계적으로 약 50여종이나 존재한다고 한다. 해조류 중에서 가장 넓게 분포한다는 것은 한국과 일본 뿐만 아니라 전 세계의 바다 곳곳에서 서식한다는 뜻이다.

한국과 일본의 어민들이 어구나 표류하는 나뭇가지에 김이 달라붙어 있는 것을 발견했듯이 다른 나라의 어민들도 똑같은 현상을 충분히 발견하고 인지했을 가능성이 크다는 것이다. 그런데 한국과 일본의 어민들은 같은 현상을 관찰하고 이용하여 300~400년 전부터 김을 양식하기 시작해 기술발전을 거듭해가며 현재까지 왕성하게 양식을 하고 있는 점에서 특별하다고 할 수 있다.

김양식 기술의 발견이 필연일 수 있었던 이유는 그 우연을 발견하는 눈이 어민들에게 있었기 때문이다. 역사적으로 오랜 기간 해조류를 식품으로 즐겨 먹었고 증산을 위한 노력을 기울여온 점을 들 수 있다.

‘삼국지위지동이전’에 옥저가 고구려에 해조류를 조공으로 바쳤다는 기록이 전하고, 송나라 서긍의 ‘고려도경’에서 육류는 비싸서 귀족들이 먹고 어류와 해조류는 평민들이 즐겨먹는 것으로 소개되어 있으며, 조선시대 공납품으로 각지의 해조류가 소개되어 있다.

일본에서는 고대부터 해조류를 채취하여 교역하였고, 다이호(大宝)율령이 반포되어 요로(養老)연간(720년)부터 해조류를 공납하게 하였으며, 가마쿠라시대부터 무로마치시대에 걸쳐 전국적으로 해조류가 교류되고 에도시대부터는 전문 상인들에 의한 산업으로 성장하기에 이른다.

이렇듯 한국과 일본은 역사적으로 해조류를 채취하고 섭취하며 국가에서 중요하게 관리하는 품목이었던 것이다. 김양식 기술을 착안하게 된 것은 역사적으로 다양한 해조류를 채취하고 섭취해 온 사회문화적 배경에 있다고 할 수 있다.

해조류 중에 가장 넓게 분포하는 종이 김이기 때문에 세계 곳곳에서 어구나 표류하는 나뭇가지에 김이 붙어있는 것을 확인할 수 있지만, 역사적으로 해조류를 음식으로 섭취하는 문화가 발달하였기 때문에 양식을 시도하게 된 것이다.

다양한 해조류를 채취하고 즐겨먹었음에도 왜 다른 해조류보다 김을 먼저 양식하게 되었는지에 대해서 생각해 볼 지점이 있다. 20세기 중반까지 한국과 일본의 김양식 방법은 바다에 떠다니는 김포자가 착상하도록 섶이나 발을 꽂아놓고 기다리는 것이 양식기술의 핵심이었다. 이 방법은 어구나 표류하는 나뭇가지에 김이 달라붙는 것과 크게 다르지 않은 것으로 전형적인 불완전양식에 해당한다.

자연상태에서 흔히 관찰할 수 있는 현상과 양식기술이 거의 유사한 것이다. 해조류의 종류가 많지만 김이 자연적인 양식기술로 포착된 것은 서식지가 바닷물과 지표면이 맞닿는 조간대 최상층부인 점이 중요한 이유라고 할 수 있다.

자연산 해조류를 채취하는 방식을 살펴보면 그 이유를 쉽게 이해할 수 있다. 자연산 김은 해안가에서 손이나 전복껍질 등으로 채취하는 반면, 우뭇가사리나 미역·톳·다시마 등은 수중에 서식하기 때문에 잠수를 하거나 5m에 달하는 긴 낫 등을 만들어 힘들게 채취한다. 

즉 자연 상태에서 김은 해안선을 기준으로 최상층부에 서식하기 때문에 표류하는 나뭇가지나 어구에 서식이 가능하고 어부들이 쉽게 관찰할 수 있지만, 우뭇가사리나 미역·톳·다시마 등은 어구나 표류하는 나뭇가지에 서식하기 힘들고 서식하더라도 일반 어부들이 쉽게 관찰하기 어려운 조건에 있는 것이다. 

결과적으로 김양식은 해조류를 음식으로 섭취하는 사회문화적 배경과 해안가 최상층부에 서식하는 생태적 속성이 결합되어 성립된 우연이자 필연의 산물이라고 할 수 있다.

글·사진/송기태(목포대 도서문화연구원 교수)
정리/박지훈 기자 jhp9900@namdonew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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