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도일보·목포대도서문화연구원 공동기획 = 전남 희망 아이콘 ‘섬·바다’이야기
<19> 해도입보(海島入保)
대몽항쟁 ‘섬의 가치’입증하는 역사적 교훈
우리나라 섬 65% 점유 ‘해도입보’ 전략 중심지
입도민 조직적 저항 ‘압해도 해전’ 대표 사례로
최근 ‘섬에서 한 달 살아보기’ 프로그램 주목

해도입도를 통한 전남지역 대표적 대몽항전지로 ‘압해도 해전’을 꼽는다. 당시 입도민들은 압해도 송공산성을 이중의 입보처로 활용하면서 몽골군에 결사적으로 맞서 결국 승리를 거뒀다. 사진은 하늘에서 바라본 압해도 송공산성 모습. /위직량 기자 jrwie@hanmail.net

우리나라 역사의 주요 공간은 육지이다. 하지만 육지에서의 인간사에 문제가 생기거나, 육지를 대체할 공간이 필요할 때면 수시로 바다나 섬이 피난처 혹은 대안의 공간으로 등장한다. 오늘날과 마찬가지로, 과거의 한국사 속에서 육지의 대안으로 섬이 주목을 받은 적이 여러 번 있었다. 그중 최고의 역사적 경험이 13세기 대몽항쟁의 시기 해도입보(海島入保) 전략이 아닐까 한다.

# 섬, 대몽 항전의 본거지

잘 알려져 있듯이, 몽골족이 세운 원나라는 아시아를 넘어 동유럽과 아랍에까지 영역을 넓혀 인류 역사상 가장 큰 제국을 이룩하였다. 그 과정에 동쪽을 정벌하기 위해 1231년~1259년에 수 십 차례에 걸쳐 고려를 침공하였다. 세계대제국 몽골의 침공에 맞선 고려인들은 1232년 강화도 천도에 이어 1270년 진도, 1271년 제주도로 근거지를 옮겨가며 싸웠다. 한국사에서는 3년 남짓의 삼별초 항전을 포함한 40여 년 동안을 ‘대몽항쟁’시기라고 부른다.

이 시기 고려왕조는 군사적 열세를 고려하면서 장기전을 치르기 위해 지역민들에게 인접한 섬(海島)으로 들어가(入)생명을 보전하라는(保)군사전략을 하달하였다. 이른바 해도입보(海島入保) 전략을 전개한 것이다. 앞서 말한 1232년 최씨 무인집정자의 강화도 천도와 삼별초의 진도·제주도로의 이동도 사실상 해도입보의 결정판이었다. 물론 전쟁 초창기에는 몽골의 침입을 피하고자 전통적인 방어 전술인 산성입보(山城入保), 즉 산성으로 들어가서 싸우도록 명하였다. 전남의 입보산성으로는 진도의 용장산성을 비롯 장흥 수인산성, 나주 금성산성, 장성 입암산성, 담양 금성산성 등이 유명하며, 최근에는 해남의 금강산성도 확인되었다. 이처럼 대몽항쟁시기 고려정부는 몽골군과의 정규전을 포기한 채 산성·해도 입보책이라는 차선의 항몽 전략을 채택하였다.

산성 입보에 비해서 해도 입보는 해전(海戰)에 익숙하지 않던 몽골군을 방어하는 장기전에 효과적이었다. 이러한 전략은 몽골군 수뇌부가 고려와의 전쟁 실패를 스스로 인정했을 정도로 장기간의 대몽 항전을 이끌었던 원동력으로 작동하였다. 몽골군은 1254년(고종 41)부터 고려인들이 입보한 해도에 대한 본격적인 침공을 단행하였지만, 소기의 성과를 달성하지 못한 채 퇴각하였다.

# 압해도 입도민(入島民), 몽골군에 승리

대몽항쟁 시기 해도입보 전략은 한반도 서북부의 평안도부터 황해도·경기도·충청도를 거쳐 전라도와 경상도에 이르기까지 곳곳의 크고 작은 섬에서 이루어졌다. 입보의 장소가 되었던 섬 중에서 잘 알려진 곳으로 인천 영종도, 안산 대부도, 신안 압해도, 완도, 진도, 경남 남해도 등이 있다.

특히 우리나라 섬의 65%가량이 자리한 전남지역은 해도입보 전략의 중심지였고, 서남해의 주요 도서는 전쟁의 변란을 피할 수 있는 피난처로 손색이 없었다. 입보처로 활용되었던 섬은 육지와 비교적 가까우면서 간간이 몽골군에 타격을 가할 수 있는 요충지에 자리하였다. 물론 이보다 더 중요한 조건은 입도민(入島民)에게 식량과 식수를 제공할 수 있는 토지와 저수지였다. 이것을 갖추지 못한 섬에서는 간척사업을 통해 확보하였다.

한편 해도입보를 통한 전남의 대표적 대몽 항전으로 1256년(고종 43) ‘압해도 해전’을 꼽을 수 있다. 전남지역은 1255년부터의 6차 몽골 침입 때에 주요한 전선이 되었다. 몽골군은 강화도로 연결되는 전남 서남해의 조운로를 차단하기 위해 지역민들이 입보해 있던 섬을 비롯하여 전남지역 도처를 공략하였다. 이러한 첩보를 사전에 접한 전남의 지역민들은 이미 압해도 등의 해도에 입보해 있었다. 이듬해 6월에 담양·광주에 주둔하였던 차라대(車羅大) 장수가 이끌던 몽골군은 무안군으로 이동하여 70척의 전함을 건조하였다. 그런 다음 그곳에서 곧바로 바다를 건너 압해도의 북쪽 해안을 공격하였다. 이때 입도민들은 압해도의 송공산성을 이중의 입보처로 활용하면서 파상공세를 펴는 몽골군에 결사적으로 맞섰다.

고려사절요 기록에 따르면, 압해도 주민들은 해안 곳곳과 큰 배에 대포(大砲)를 비치하여 몽골군을 위협하였다. 투석기의 일종인 포(砲)를 활용하여 몽골의 전함을 물리친 것이다. 이러한 압해도 해전의 승리는 중앙군의 지원도 있었지만, 무엇보다 전남 입도민의 조직적인 저항이 있었기에 가능하였다. 이 해전을 통해 획득한 서남해의 제해권은 이후 1271년까지 전남지역에서 대몽 항전을 펼칠 수 있었던 버팀목이었다.

# 오늘날 ‘해도입보’ 전략은

앞서 소개한 13세기 초·중반의 해도입보는 시의적절한, 성공한 군사전략으로 평가되고 있다. 물론 해당 시기는 한국역사상 가장 처절했던 국가적 전란의 시기였다. 이 때문에 오늘날 섬의 가치를 강조하기 위해 ‘해도입보’라는 역사적 경험을 끌어들이는 것이 적절한가 하는 생각도 든다.

최근 들어 ‘섬에서 한 달 살아보기’ 프로그램이 주목받고 있다. 한 달은커녕 1주일이나 단 며칠이라도 섬 여행을 꿈꾸는 것은 도시·일상·스트레스·공해 등으로부터 탈출이나 해방감을 맛보기 위해서일 것이다. 13세기 전란을 피해 해도에 들어가 생존을 꾀했던 선조들과 같이 현대인들도 ‘섬’이라는 피난처에 들어가 보기를 권유해 본다. 다시 돌아갈 육지에서 살아갈 활력을 되찾는 전략을 세워보는 것도 좋을 것이다.

글/한정훈(목포대 사학과 교수)

정리/박지훈 기자 jhp9900@namdonews.com
 

"광주전남 지역민의 소중한 제보를 기다립니다"  기사제보
저작권자 © 남도일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