담양 문화류씨(文化柳氏) 중문지후사공파 석헌종가 /와송당 <59>
한류콘텐츠 보물창고 광주전남 종가 재발견
늘푸른 소나무처럼 ‘절의’(節義) 지킨 명문가
삼한공신 류차달을 시조로 모셔
무신정권 종식… 文化를 본관으로
사육신 류성원·기묘명신 류옥
‘절의’ 가통 상징 ‘와송당’ 보전

전남문화재자료 제192호(류종헌가옥)로 지정된 종가 전경

전남 담양 창평 해곡리 얼그실마을에는 16세기 조선유학 르네상스를 이끌었던 대표인물들의 삶의 흔적이 오롯이 남아있는 류종헌가옥(전남문화재자료 제192호)이 있다. 성군이 다스리는 이상국가를 꿈꾸던 조광조와 신진사림의 개혁정치가 기묘사화로 꺾이기 직전, 그 발단이 됐던 신비복위의 상소로서 사림을 대표했던 석헌 류옥 선생의 ‘생가’다. 선생의 사돈인 김윤제(환벽당 주인)가 자신의 제자 정철(1536~1593, 호는 송강)을 류옥의 손녀와 혼인하게 해 송강의 신혼생활 터전이 됐던 와송당이 현존하고 있다. 하서 김인후를 비롯한 명사들의 문장에 묘사된 와송당과 석헌 가옥을 보전하며 선조의 절의 정신을 계승하고 있는 문화류씨 중문지후사공파 석헌 종가를 찾아 가문의 내력을 살펴본다.

◇복야공 류택 후손 고려·조선 명문가
문화류씨는 왕건의 남방정벌군에게 1천 수레 군량을 조달해 고려 건국을 도왔던 공으로 태조로부터 차달(車達)이라는 이름(본명은 류해)을 하사받고 삼한공신, 대승에 오른 류차달을 시조로 모신다. 그의 아들 류효금이 황해도 구월산에서 산신령인 범을 구해 음덕이 자손에 미친다는 씨족 설화가 전해진다. 7세 류공권(1132~1196)은 시문에 능하고 초서·예서의 명필로서 과거 급제해 예빈경으로 금나라에 다녀왔고, 벼슬은 국자감 대사성을 거쳐 한림학사 지공거, 동지추밀사, 정당문학에 올랐다. 청렴한 관료로 알려지고 동문선에 수록된 시와 더불어 해동필원과 용인 서봉사 현오선사비문 글씨를 남겼다.

류공권의 아들 류언침(?~?)과 류택(?~?) 대에서 상서공파와 복야공파로 분파됐다. 류택은 과거 급제하고 금나라에 사신으로 다녀왔으며 비서감으로 동지공거를 역임하고 상서우복야, 한림학사승지에 올랐다. 그의 아들인 9세 류경(1211~1289)은 임경숙의 문하에서 과거 급제해 상서, 국자감대사성을 역임하고 무신정권 집권자 최우의 손자 최의가 극심한 흉년에 백성을 구휼하지 않아 민심을 잃자 김준 등과 함께 최의를 죽이고 왕권을 회복했다. 고종은 최씨 무신(武臣)정권을 종식시킨 류경의 공을 인정해 그의 고향 황해도 유주를 문화(文化)로 개칭하고 토지와 저택을 하사했다. 그의 벼슬은 수태보, 참지정사, 문하시랑평장사에 이르고 추성위사공신에 올랐다.

◇조선 충절의 상징인물 배출
이로 인해 류씨는 본관을 황해도 문화로 하여 고려·조선에 이르는 명문가로서 세계를 잇고 있다. 시조로부터 19세에 이르는 자손·사위·외손 등 4만2천여명의 약력과 관직을 수록한 ‘문화류씨 가정보’(1565)는 안동권씨 성화보(1476)가 1980년 발견되기 전까지 가장 오래된 족보로 알려졌다. 10세 류승(1248~1298)은 성실하고 효성이 지극해 청렴한 관리로 알려졌으며, 벼슬은 지밀직사사, 도첨의참리에 이르렀고, 조정 조회 의례에 관한 ‘신의’를 편찬했다. 그의 아들 대에 분파했는데 큰 아들 류인수(?~?)는 중문지후사를 지내고 중문지후사공파를 열었다. 셋째 류돈(1274~1349)은 문과 급제해 벼슬은 예문관대제학에 올랐고 그의 손자 류만수(?~1398)가 태조 이성계와 함께 위화도 회군한 조선개국원종공신으로 좌상공파를 열었다.

16세 류성원(?~1456)은 세종 때 문과 급제해 집현전저작랑, 춘추관기주관,성균관사성을 역임하며 의방유취, 고려사, 세종실록, 문종실록 편찬에 참여하고, 좌사경으로 왕세자(단종) 사부를 맡았으며, 사헌부집의를 역임했다. 계유정난과 단종 선위 후에는 복위운동을 계획했다가 성삼문·박팽년에 대한 고문 소식을 듣고 체포 직전 자결했다. 그는 조선 충절의 상징 ‘사육신’으로 존경받았으며 노량진 민절서원, 전북 임실 강촌충경사에 배향하고 추모했다. 그의 재종형인 16세 류인흡(?~?)은 사육신 탄압의 화를 피해 전라도 순창으로 이거했고, 순창 훈도였던 아들 류문표(?~?)가 부인 성주현씨의 본가인 창평에 입향했다.

◇삼인대 상소 쓰고 개혁 주창한 석헌
류인흡의 손자인 18세 류옥(1487~1519, 호는 석헌)은 문장이 뛰어난 신동으로 알려져 약관의 나이에 문과에 장원급제하고(1507) 홍문관수찬을 거쳐 무안현감을 역임했다. 중종의 조강지처인 왕비 신씨를 폐위시킨 반정공신들을 규탄하며 당시 담양부사 박상(호는 눌재), 순창군수 김정(호는 충암)과 함께 순창 삼인대에 관인을 걸고 연명으로 ‘청복고비신씨소(신비복위소)’를 작성한 사림의 명신이다. 그는 사헌부장령, 함경도평사, 의정부사인 등을 역임하며 한전균전제 실시를 상소하는 등 유배나 좌천을 두려워하지 않고 개혁에 앞장섰다. 군신의 의리 뿐만아니라 부부의 의리 역시 도학정치를 실천하는 성군의 덕목이라 설파했던 상소문은 조선조 군신 모두에게 영향을 준 것으로 평가된다. 이 상소가 기묘사화의 발단이 됐다. 그는 기묘사화 직전 젊은 나이에 사망해 순창 화산서원에 배향됐고 ‘석헌집’을 남겨 500년 전통의 석헌종가를 열었다.

22세 류동기(1590~1646)와 그의 아들 류현(1614~1672)은 부자가 함께 병자호란 의병군에 참여했다. 류동기는 진사시에 합격했으며, 창평 의병 도유사로 활약했다. 류현은 의병을 모아 남한산성에서 활약하고, 문과 급제해 병조정랑, 경성판관, 사간원정언을 역임했다. 30세 류식(1766~1836)은 생원시에 합격해 선조의 학덕을 계승했다. 종가는 16세 류인흡부터 26세 류성화(1678~1713)까지 11대 12명이 남긴 시문과 행적을 묶어 ‘유주세적’을 발간하고(전라남도 향토문화연구자료 제14집) 류옥선생추모학술대회를 개최하는 등 선조의 정신 계승에 힘쓰고 있다.

◇와송당 보전하며 가통 계승 노력
류강항(류옥의 둘째아들, 정철의 장인)의 친구로 와송당을 방문한 하서 김인후(1510~1560)는 ‘와송당에서 자다’라는 글을 남겨 당시의 정취를 짐작케 했다.

‘군직을 찾아서’
“내가 오니 비도 따라서 오네./ 산신령 뜻이 있는 것 같도다.
소리는 소나무 밖에서 시끄럽고 / 푸른 빛은 땅에 가득하도다.
다시 두어가지 매화꽃이 좋구나. 향기 나부껴 손님 코에 들어오네.”

<류안중 문화류씨 정간공대종회장 번역, 류한호 전 광주대 교수 글에서 재인용>

류강항(자는 군직)은 아들이 없어 정철의 후손들이 500여년 동안 외손봉사로 향사하고 있다. 종가의 연못 위를 뒤덮었던 와송 때문에 와송당이라는 당호가 붙었으며, 1918년 와송이 죽어 절구와 구유통으로 만들었다고 한다. 와송당은 건립연대는 특정할 수 없으나 송강 정철의 4남 정홍명이 쓴 외가중수상량문에 따르면 1647년 중수했던 것으로 추정된다. 가문의 제각인 저존재에 그려진 그림과 종가가 보존했던 병풍의 그림을 통해 당시 와송의 모습을 볼 수 있다. 가문의 보배인 와송 그림의 병풍은 수년전 도난당했고 지키지 못한 안타까움에 노종부는 어린 와송을 와송당 옆에 식재했다. 종가는 병풍이 제자리로 돌아오기를 갈망하고 있다. /서정현 기자 sjh@namdonews.com

와송당과 어린 와송
와송당 전경
와송당 후면
사당
종가 안채
문화류씨 제실 서륜재
서륜재
고목이 된 홍매로 ‘와송매’라 부른다.
사랑채 와송당
유주세적 표지. 유주는 문화류씨 본관인 황해도 문화의 옛이름이다. 유주세적은 이 집안 12명 인물의 시문 행적을 묶은 기록물로 1986년 전라남도에서 항토문화연구자료 제14집으로 발간했다. 자료 인물은 류인흡, 류문표, 류강수, 류강항, 류홍원, 류명, 류전, 류동기, 류현, 류세경, 류춘원, 류성화 등 12명이다. / 강진문화원 사진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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