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도일보·목포대도서문화연구원 공동기획 = 전남 희망 아이콘 ‘섬·바다’이야기
<18> 삼치
품격없는 생선에서 도서지방 별미로 ‘대변신’
조선시대엔 불길한 물고기로 간주 ‘외면’
일본 주도로 19세기 후반 삼치 어업 시작
‘조일통상장정’강제 체결 이후 노골화
추자도에서 유자망·끌낚시 사용 어획
100여년간 일본 식탁 연결고리 ‘역할’

조선시대에만 해도 사람들에게 외면당했던 삼치는 일본에서 고급 생선으로 명성을 날렸다. 우리나라에서는 최근에서야 사람들의 입맛을 돋우는 생선으로 거듭났다. 사진은 삼치잡이 소형 동력선.

가을과 겨울철 서남해 도서 지방을 다니다 보면, 긴 낚시줄을 매단 아주 긴 대나무 장대를 선체에 매단 소형 동력선이 정박해 있는 광경을 쉽게 볼 수 있다. 삼치잡이 어선이다. 삼치는 봄철에 북쪽으로 이동했다가 다시 남쪽으로 회유하기에 한반도에서도 지역에 따라 어획되는 시기가 조금씩 다르다.

그러나 삼치 어업철이 되면 서해 전역과 남해 도서 지방에서 삼치를 잡지 않는 곳이 별로 없다. 또, 이때쯤 어판장에 나와 있는 가장 큰 생선도 보통 50cm에서 1m까지 이른다. 삼치는 한반도 남부 전역에서 어획되는 물고기이지만, 한국 도서 지방의 어민들이 삼치를 잡게 된 것이나, 이를 한국 사람들이 즐기게 된 것은 생각보다 오래되지 않았다.

삼치는 지금도 망어(동해)나 망에(통영) 등으로 불리는데, 발음이 한자어 亡魚(망어)와 유사해 불길한 물고기로 간주되었다. 또, 충청도 지방에서는 삼치를 우어(憂魚)라고 칭하며 기피하는 경향이 있었다. 그래서 19세기 문헌에 따르면, “사대부집에는 주방에 잘 들여놓지 않았고” 일부 어민 외에는 거의 먹지 않았다.

본격적인 삼치 어업이 시작된 것은 19세기 후반 일본 정부가 일본 어민의 합법적인 월경 어업을 허용하도록 조선 정부에 1883년 朝日通商章程을 강제해 체결한 이후이다. 그러나 이전에도 실제 불법적인 월경 어업이 있었는데, 유력한 설은 1870년 오이타현(大分縣)의 어민들이 상어 어업을 위해 넘어 온 것이었다. 당시 오이타현의 어민들은 어획한 상어의 지느러미만 떼어 가공해 중국에 수출해 큰 수입을 올렸다. 상어를 먹지 않기에 지느러미를 뗀 상어의 몸체는 바다에 버렸다.

한반도 근해로 넘어온 일본 어민들은 중국 수출품으로서 상품성이 높은 상어 어업을 비롯해 전복, 해삼 등의 채취 어업에 종사했고, 일본 내 수요가 높은 도미 어업에 종사하는 이도 많았다. 그러다 얼마 안 있어 삼치와 멸치 어업에 종사하는 이가 급격히 늘어났다.

삼치는 일본에서는 조선과 다른 대우를 받았다. 19세기 후반과 일제시기에 걸쳐 한반도 연안으로 넘어온 일본 어민 중 많은 이들은 일본 오사카와 규슈 사이의 내해인 세토내해에서 넘어왔다. 일본 오사카, 오카야마현, 가가와현 주변 지역에서 삼치는 관혼상제에 사용되던 물고기였다.

특히 오카야마현 지방에서 높은 가격에 팔려 일본의 삼치 가격은 오카야마에서 결정된다는 말이 있을 정도였다. 오사카와 가가와현에서 삼치는 설날에 먹는 명절 음식이었다. 오사카 서쪽의 가가와현에서는 며느리가 시댁에서 구입한 큰 삼치를 친정에 가져가 요리한 뒤 시댁에 갈 때 가져가는 풍습이 있었다. 삼치가 시댁과 친정을 오가는 정중한 선물로 사용되었던 것이다. 또, 큰 삼치를 사서 친척들을 불러 함께 먹었고 남은 꼬리 부분을 부적으로 출입구에 걸어두는 풍습도 있었다.

처음에는 일본 어민만 잡던 생선, 삼치는 차차 조선 어민들도 기술을 배워 잡기 시작해 일본 어민보다 어획량이 많아졌다. 그러나 삼치는 조선 사람들이 선호하지 않았기에 ‘제 값’을 받을 수 없었고 결국 모두 일본으로 넘어갔다. 이러한 조선 삼치의 여행은 광복 이후에도 오랫동안 유지되었다.

추자도에서 삼치는 유자망과 끌낚시를 사용해 어획했다. 둘 중에 조기 잡이에도 사용되던 유자망 어업이 주력이었다. 유자망 어선은 충청도의 외연도라는 곳에서 시작해 점차 남쪽으로 내려오며 조업했다. 추자도 사람들도 여름철 멸치잡이를 끝낸 뒤 바로 충청도 외연도까지 올라가 삼치를 잡기 시작해, 충남 삽시도, 전북 위도, 전남 흑산도를 거쳐 추자도까지 내려왔다.

삼치 어선이 지나는 서해 섬마다 무역선이 다니며 삼치를 매집해 일본으로 보냈다. 일본에서 프로레슬러로 유명해진 재일동포 김일 씨가 운영하던 무역선이 추자도 근방에 정박하며 삼치를 비롯해 참돔, 방어, 전복, 소라, 톳 등을 수매해 돌아갔다. 특히 삼치는 성탄절 경에 가격이 가장 높았다. 삼치 어기가 끝날 무렵이기도 했고, 품질 좋은 삼치가 필요한 서일본의 양력설이 다가오고 있었기 때문이다.

삼치는 외화를 벌어주는 비싼 수출품이었기에 한국 사람들이 먹기 힘들었다. 사실 그보단 한국 사람들이 선호하지 않았기 때문에, 일본에 수출하지 않더라도 그다지 먹고 싶어 하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여하튼 30년 전부터 삼치가 외화를 벌어주던 시대는 끝났다. 지금도 가을철과 겨울철에 흑산도, 추자도 등의 서남해 도서에 가면 끌낚시로 잡은 삼치회를 맛볼 수 있다.

몇 년 전에 필자와 함께 추자도에서 삼치회를 먹은 일본인 친구는 맛이 일본에서도 먹기 힘든 일품이라고 했다. 삼치 맛을 구분하지 못하는 필자에게는 인상적인 평가였다. 아마도 한국에서 잡힌 삼치가 일본으로 전량 수출되던 시절, 서일본 출신인 일본인 친구가 정월에 먹었던 삼치도 한국산이었을지 모른다.

우리도 모르게 삼치는 100여 년간 추자도와 멀리 떨어진 일본의 식탁을 연결해 왔다. 지난 20세기의 변화를 생각해 보면, 앞으로 추자도 섬주민들은 어떤 네트워크 속에서 존재하게 될까 궁금해진다.

글·사진/오창현 (목포대 고고문화인류학과)

정리/박지훈 기자 jhp9900@namdonew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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