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도일보·목포대도서문화연구원 공동기획 = 전남 희망 아이콘 ‘섬·바다’이야기
<15> 소나무와 부역

“역사 속의 섬은 소나무 배양지였다”
성종실록에 전라도 소나무 특별 관리 대상
재배·벌목 따른 ‘노동력 착취’ 사회 문제화
최근 개봉영화 ‘자산어보’에서 묘사 잘 드러나
일제시대, 전남 연안·섬 공출 증언도 같은 맥락

‘천사대교’는 ‘섬의 고장’신안군을 육지와 하나로 묶는데 결정적 역할을 했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코로나 19 장기화로 해외여행을 나설 수 없는 사람들이 섬을 찾는 횟수가 부쩍 늘었다. /위직량 기자 jrwie@hanmail.net

최근 섬을 찾는 사람들이 부쩍 늘어났다. 최근 ‘천사의 섬’ 주차장에서 본 자동차의 뒤태에서 변화의 물결을 실감하였다. 그들을 마중하기 위해 섬사람들은 도로변에 공터를 만들고, 그곳에 간이 주차장과 이동식 화장실을 들여놓았다. 그것을 본 육지 사람들은 불편한 마음을 토로하였지만, 섬 주민들의 입장에선 갑자기 찾아온 손님에게 임시방편으로 편의시설을 제공한 터일 것이다.

이러한 사태(?)는 Covid-19의 여파라 여겨진다. 지난해 2월부터 우리들의 해외 출구가 닫혔다. 그래서 사람들은 ‘비행 모드’를 ‘자가 모드’로 전환하였고, 때마침 섬과 육지를 이어주는 연육교가 개통되면서 섬을 찾아 나섰을 것이다. 아마도 섬을 찾고 싶었던 그동안의 바람이 한꺼번에 표출된 것이 아니었을까 싶다. 그들에게 역사 속 섬의 한 페이지를 소개하려고 한다.

기록을 통해 본 섬은 ‘송전’ 혹은 ‘봉산’이라 칭하였다. 송전이란 ‘소나무밭’을 지칭하고, 봉산은 ‘벌채를 금지 한 산’을 의미한다. 전근대의 섬은 소나무 배양지로 활용되었다. 봉산에도 그 종류가 다양하였는데, 왕이나 왕비의 능묘를 보호하는 태봉봉산(胎封封山)이 있는가하면, 황장목 생산을 위한 황장봉산(黃腸封山)이 있었다. 특히 황장봉산의 소나무는 궁궐이나 관아, 사찰과 서원을 건립하는데 사용하였다.

1761년에 금당도 봉산이 혁파되자 금당도 차우리 공동체가 마을 뒷산을 공유자원으로 관리하였다. 1904년(갑진) 금당도 차우리 목계(땔감계) 계책이 소나무 이야기를 전해준다./김경옥 교수 제공

또 전선과 병선을 건조하거나 간척지를 만들 때 제방 건설용으로도 제격이었다. 심지어 소나무 껍질은 구황식품이었다. 이런 까닭에 송전과 봉산 인근 지역 주민들은 소나무 가지가 늘어 서 있는 곳에서는 농사를 지을 수 없었다. 행여 농사를 핑계 삼아 솔가지 하나라도 꺾어가는 것을 미연에 방지하기 위함이었다. 송전의 소나무는 문서대장에 일일이 올려놓고 관리하였다. 그래서 국용 목재를 벌목하려면 해당 지방관에게 신청서를 접수하고, 국가의 심의를 받은 연후에 가능하였다.

그런데 흥미로운 것은 전국에 분포하고 있는 송전 가운데 유독 전라도 송전이 가장 으뜸으로 평가되었다. 이러한 사실이 ‘성종실록’에서 확인된다. 성종 때 사헌부에서 이르기를, “배 만드는 목재는 반드시 소나무를 써야 하는데, 이미 변산의 소나무가 다 없어져서 장차 완도로 자리를 옮겨야한다고 합니다. 완도의 소나무가 다 없어지고 나면 이제 어디에서 소나무를 구해야 합니까?”라고 보고하였다. 이렇듯 전라도 소나무는 특별 관리 대상이었다.

그런데 문제는 소나무로 인한 사회문제가 끊임없이 발생하였다. 예나 지금이나 세금(부역)이 문제였다. 소나무 재배와 벌목을 위해 인근 지역민들의 노동력이 필수요건이었기 때문이다. 예컨대 태풍이 지나 간 다음 풍락송 처리, 장례용 목곽 건조를 감독하는 일, 땔감을 구하러 몰래 입산하는 이웃을 고발하는 일 등으로 인해 갈등이 야기되었다.

최근 개봉된 영화 ‘자산어보’ 포스터.

최근에 개봉한 영화, 이준익 감독의 ‘자산어보’에서 그 단면이 잘 묘사되어 있었다. ‘자산어보’는 유배인 정약전과 흑산도 주민 장창대를 주인공으로, 조연으로 정약전의 배소를 제공한 ‘가거댁(이정은 역, 가거도에서 흑산도로 시집 온 섬 여인의 택호)’과 ‘흑산도 별장(조우진 역)’을 중심으로 한 근대 변화의 물결을 스케치한 영화였다.

송전과 관련된 장면은 가거댁이 어린 소나무 묘목을 캐서 버리는 대목이었다. 이를 지켜 본 유배인 정약전이 가거댁에게 질문한다. “왜 어린 묘목을 굳이 캐서 버리는가?” “이 묘목이 땅에 뿌리를 내리지 않아야 섬사람들이 살 수 있습니다.” 역설적이지만 전근대 임야는 땔감을 얻을 수 있는 유일한 보고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극 중 가거댁이 “소나무가 없어야 사람이 살 수 있다.”라고 외치고 있다. 전근대 섬 주민들에게 부과되었던 세금으로 인한 고충이 가히 어느 정도였는지 미루어 짐작케 한다.

오늘날 전라도 연해와 섬마을의 소나무가 일제 때 일본인들의 공출을 증언이라도 하듯 가느다란 허리로 서 있다. 해방 이후에 겨우 땅에 뿌리를 내린 소나무의 송진이 매년 4월 이맘때 쯤 역사이야기를 전해주는 듯하다.

글/김경옥(목포대학교 도서문화연구원 교수·도서해양사 전공)

정리/박지훈 기자 jhp9900@namdonew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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