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성 황주변씨(黃州邊氏) 삼파 망암종가 <42>
한류콘텐츠 보물창고 광주·전남 종가 재발견

조선 국방과학 선구자 집안

성리학자 변이중 종가열어
망암집에 조선 ‘화차도’ 남겨
변윤중 일가 충효열 순절 일화
자하문집·창암유고 등 전승

 

봉암서원 전경

전남 장성 황룡강 인근에 봉암서원이 있다. ‘문불여장성(文不如長城)’이라는 고장의 명성이 충효사상과 동양철학을 토대로 전승된 유산이라는 사실을 입증이라도 하듯 망암종가 인물들의 문집과 함께 서원이 보존돼 있다. 집안의 가산은 물론 가솔들의 목숨까지 다 바쳐 풍전등화의 조선을 구하는데 앞장선 황주변씨(黃州邊氏) 삼파 망암종가를 찾아 가문에 전승되는 정신과 내력을 살펴본다.

◇고려에 귀화한 변려 시조
황해도 황주를 본관으로 하는 황주변씨는 중국 농서 출신으로 송나라가 망하자 고려에 귀화한 변려(?~?)를 시조로 모신다. 8세 변광수(?~?)는 공민왕 때 공신으로 우도병마사를 지내고 공조판서에 올랐으나, 신돈이 꾸민 최영 장군에 대한 중상모략에 연루돼 삼척에 유배됐다. 변광수의 조카인 9세 변정(?~?)이 중군사정이라는 벼슬을 버리고 장성에 은거해 황주변씨의 장성 입향조가 된다. 왕실 외척으로서 불사이군의 충정을 지켜 오다가, 13세인 변택(1518~1577)이 희릉참봉을 역임했고 황주변씨 삼파를 열었다.

◇임란 공신 변이중 종가 열어
14세인 변이중(1546~1611)은 율곡 이이, 우계 성혼의 문하에서 공부하고 성리학과 경학에 밝아 문과 급제 했으며 이조좌랑, 황해·평안도 도사, 소모사, 조도사, 선산부사 등을 역임하고 망암종가를 열었다. 변이중은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소모사가 되어 군비를 수습했으며, 조도사로서 전라도에서 병력·군량·무기 등을 찾아 조달하는 중책을 맡았다. 전라도 일대에서 군비를 수습하던 변이중의 사촌동생 변윤중은 집안의 양곡과 마초, 재물을 모아 기부했다고 한다.

또한 변이중은 화차 300량을 당시 행주산성을 지키던 순찰사 권율 장군에게 전달해 행주대첩 승리에 기여했다. 후손들은 변이중이 남긴 문집 ‘망암집’에 수록된 총통화전도설, 화차도설 등을 근거로 화차 등 당시 무기 18종을 복원해 장성군 장안리에 ‘시징당’을 세우고 전시하고 있다. 전시관은 조선 중기의 신기전, 총통 등을 비롯해 변이중이 개발했다고 전해지는 ‘화차’가 재현돼, 무기 역사, 조선 과학사에 빛나는 업적으로서 종가의 자부심을 드높이고 있다.

◇삼강정려에 빛나는 변윤중 일가
변이중의 사촌동생인 변윤중(?~1597) 일가의 충효열 스토리가 애절하다. 변윤중은 정유재란을 맞아 가솔을 포함 200여 의병군을 모아 장성에서 왜군과 싸우다 중과부적의 상황에 몰려 황룡강에 몸을 던져 순절했다. 그의 부인 함풍성씨 역시 구차하게 사느니 남편을 따르겠다며 투신했다. 부모와 함께 의병으로 싸웠던 외아들 변형윤도 순절하려 했지만, 부인 장성서씨가 부모님은 자신이 하늘까지 모실 것이니 대를 이어 집안을 지켜달라는 유언을 남기고 강물에 뛰어들었다. 부모 보다 하류에서 투신했던 며느리 서씨는 시어머니의 손을 잡은 채 시신으로 발견됐다고 한다. 나라에서 뒤늦게 이러한 사실을 확인하고 순절한 세 사람을 각각 충신, 열부, 효부로 칭하며 그 정신을 만백성에게 알리기 위해 ‘삼강정려’를 하사했다.

◇문집 남긴 선조의 학문 정신 계승
변이중의 아들 15세 변경윤(1574~1623)은 문과 급제하고 교서관저작을 역임하고 ‘자하문집’을 남겼다. 그는 광해군 원년에 당파에 따른 기강 문란, 국가 재정, 민생 파탄 등을 논하고 이를 시정할 것을 상소했다. 인목대비 폐비사건을 비판하며 대의를 주장하다 가산을 적몰당하기도 했다. 그는 봉암서원에 제향됐다.

16세 변명익(1610~1660)은 석주 권필에게 수학하고 청음 김상헌에게 사사 받은 유학자로서 행금산군수를 역임했다. 병자호란에 임금 수레를 호종했으며 소현세자와 사돈을 맺었고, 문집 ‘창암유고’를 남겼다. 종가조 변이중을 주벽으로 변윤중, 변경윤 등 5인의 충신을 추모하는 봉암서원은 전라남도 기념물 제54호로 지정됐다. 종가는 망암집, 자하문집, 창암유고 등 종가의 보물들을 보존하며 선조들의 정신을 계승하고 있다. /서정현 기자 sjh@namdonews.com
 

봉암서원 강당 성경당. 성리학과 경학을 배우고 익힌다는 의미로 성경당이라 불렀다고 한다.
봉암서원 사당
봉암서원 유물관 시징당
시징당에 복원된 임진왜란 당시 조선의 무기 사전총통
사전총통. 4~6개의 짧은 화살을 동시에 발사하여 500여m 밖의 적을 살상할 수 있는 총통
시징당에 복원, 전시된 임진왜란 당시 조선의 무기, 신기전.
망암집의 ‘화차도’ 기록에 의해 복원된 화차 모형. 왜적의 조총으로부터 아군을 보호하면서도 40개의 총통을 발사할 수 있어 행주대첩에 유용하게 사용했다고 전해 진다.
화차 내부 복원모형. 화차 안에 두사람이 들어가 3면의 적을 향해 40여개의 총통을 발사할 수 있다.
총통에 장착해 발사하는 화살. 왜군의 조총에 대응하여 구슬형 발사물이 사용되기 전까지 조선의주요 전략무기에 사용됐다고 한다.
일총통. 900m 밖의 선박이나 성문 격파용 무기로 현대의 박격포에 해당한다.
봉암서원 앞 삼강정려. 변윤중과 부인 함풍성씨, 며느리 장성서씨 등 세 사람의 충효열을 기려 나라에서 하사한 정려다.
봉암서원 입구 / 장성군 사진제공
봉암서원 전경 / 장성군 사진제공
봉암서원 전경2 / 장성군 사진제공
"광주전남 지역민의 소중한 제보를 기다립니다"  기사제보
저작권자 © 남도일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